문재인정부의 ‘8·2 부동산 대책’은 노무현정부의 정책 기조를 많이 닮았다. ‘투기와의 전쟁’에 나서며
‘다주택자 및 특정지역’을 겨냥해 ‘초강력 규제’ 카드를 꺼내든 모습이 그렇다. 공급보다 수요 조절에 초점을 맞춘 방향도 노무현정부를 연상케 한다. 노무현정부의 부동산 대책은 실패했다는 분석이 많았다. 정책의 옳고 그름을 떠나 ‘집값 안정’이란 목표를 볼 때 관련 수치는 부정적이다.
강력한 규제로 폭등세를 잡으려 했던 노무현정부 첫해(2003년) 집값은 13.36% 상승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퇴임한 2008년 2월 서울의 아파트 평균 거래가는 취임 때인 2003년 2월에 비해 약 57% 상승해 있었다. 자유한국당 국민의당 바른정당 등 야 3당은 8·2 부동산 대책을 놓고 “노무현정부 시즌2”를 우려했다.
한국당은 “반시장적 요소가 너무 많다”고 했고, 바른정당 이혜훈 대표는 “시장을 이기는 정부는 없다.
노무현 정부 시즌2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국민의당도 노무현정부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고 거들었다. 문재인정부의 부동산은 과연 노무현정부 시즌2가 될 것인가? ‘시장’이 ‘규제’를 이겼던 10여년 전과 지금 상황은 다른 것일까?
문재인 대통령의 투기와의 전쟁은 ‘대통령 불패’를 말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전쟁과 다른 양상으로 전개될 수 있을까? ◇ 늘 청개구리였던 부동산 시장 역대 정부에서 부동산 시장은 언제나 정책 기조와 따로 놀았다.
정부가 집값을 잡으려 하면 거꾸로 뛰었고, 부양하려 하면 뜻대로 되지 않았다.
김대중·이명박·박근혜 정부는 정권 첫해에 부동산 규제 완화책을 폈는데 정작 집값은 모두 하락했다.
집값이 전례 없이 상승한 건 강력한 규제를 꺼낸 노무현정부에서였다. 김대중정부 초기에는 외환위기 여파로 부동산 약세가 이어졌다.
전반적인 경기 침체가 이어지면서 부동산도 예외가 아니었다.
수도권 민간택지 분양가 자율화와 양도세, 취·등록세 감면 등 경기부양을 위한 부동산 정책을 내놨지만 시장의 흐름을 바꾸지는 못했다. 이명박정부 들어서도 2008년 리먼 사태 이후 수도권을 중심으로 집값이 몇 년간 약세를 보이다 하반기에야 회복세로 돌아섰다.
취·등록세율 완화, 고가주택 기준 상향 등을 통해 주택거래 정상화를 유도했다.
박근혜정부에서도 규제 완화책이 이어졌다. 취득세 한시 면제, 9억원 이하 신규·미분양주택 구입 시 양도세 면제 등의 정책이 쏟아졌다. 역대 정부 출범 이후 1년간 집값 변동률을 살펴보면 △1998년 김대중정부 -13.56% △2008년 이명박정부 -1.46% △2013년 박근혜정부 -0.29%로 각각 하락했다.
노무현정부 첫해인 2003년만 집값이 13.36% 상승했고, 문재인정부 들어서도 6·19 대책 이후 거꾸로 집값 상승폭이 확대됐다. ◇ 정책과 시장의 디커플링, 원인은? 자본주의 시장의 가장 기본적인 원리는 수요과 공급이다. 이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가격이 형성된다.
정부가 정책을 통해 개입할 수 있는 여지는 주로 공급 쪽에 있다.
얼마 전에도 조류인플루엔자 때문에 달걀 생산이 줄어 가격이 폭등하자 달걀을 수입해 공급을 늘렸다.
부동산은 이런 공급 정책을 쓰기가 매우 까다로운 몇 안 되는 시장이다. 수요와 공급의 원리를 따르자면 집값이 폭등할 때는 공급을 늘려야 하는데, 집은 그렇게 쉽게 공급을 늘릴 수 없다.
아파트를 더 지어 공급하려 해도 건축에 소요되는 기간 탓에 실제로 집이 더 늘어나려면 최소 3년은 걸린다.
도시의 채소값이 급등하면 산지에서 출하를 늘려 도시로 가져오면 되지만, 서울 집값이 과열됐다고 해서 부산이나 대구에 있는 집을 옮겨 올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 때문에 공급 확대로 집값을 잡으려던 과거 정부의 대책은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공급 확대를 통해 현재의 집값을 조절한다’는 말은 부동산 시장에서 있을 수 없다.
당장의 집값 과열을 해결해야 했던 노무현정부가 ‘수요 정책’에 매달린 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당시의 부동산 규제는 대출과 세금을 집을 사는 행위를 매우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었고,
그것만으로 되지 않자 ‘거래’ 자체가 사실상 이뤄지기 어렵도록 직접 통제했다. 그렇게 수요를 눌렀던 정책에 시장은 거꾸로 반응했다. 일부 전문가들은 “정부가 당장 공급을 확대할 수 있는 유일한 정책은 양도소득세를 낮추는 것”이라고 말한다.
양도세를 낮추면 다주택자들이 보유한 집을 매물로 내놓게 된다.
세금 무서워 집을 팔지 못하던 사람들에게 팔 수 있도록 길을 터주면 시장에는 판매 물량, 즉 공급이 늘어나는 효과가 있다. 하지만 집값 상승국면에 이런 정책을 펴기란 결코 쉽지 않다. ‘부동산 투기세력’으로 인식되는 다주택자를 거꾸로 도와주는 정책이란 비판에 직면할 가능성이 크다. 역대 정부에서 양도세 완화 정책이 나왔던 것은 오히려 집값 하락기에 ‘거래 활성화’란 명분을 등에 업고서였다.
거래 활성화란 곧 공급이 많아진다는 뜻이기도 해서 부동산 부양 효과가 그리 크지 못했던 것이다.
이처럼 공급 조절이 쉽지 않은 부동산의 속성 탓에 정책 기조와 시장 흐름은 따로 놀곤 했다.
◇ 文의 전쟁, 거래절벽 이후에 달렸다 초고강도 규제를 담은 8·2대책이 발표되자 부동산 업계는 ‘패닉’에 빠졌다.
재건축 단지 유치를 두고 경쟁하던 대형 건설사와 강남 4구 공인중개업소 등은 “예상치 못했다”며 당혹해하는 모습이다.
투기과열지구에 포함된 세종시와 당장 규제를 피한 부산 간에 희비가 엇갈리고 있다. 전문가들은 12년 만에 나온 초고강도 규제가 일단 집값 상승세를 진정시킬 것으로 보고 있다.
반면 공급 대책이 빠져 있어 장기적으로는 대책의 효과가 미미할 것이라는 전망과 함께
시장 급랭에 따른 경착륙을 막기 위한 출구대책 마련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나왔다. 2일 서울 송파구 잠실동의 A공인중개업소 관계자는 “대책의 강도가 생각보다 커 집주인들의 문의전화가 폭주하고 있는 상황”이라며
“거래가 아예 중단된 상태”라고 말했다. 서초구의 B공인중개업소 대표는 “가격이 떨어질 것을 우려한 실망 매물이 늘어나는 분위기”라며
“지난 주말부터 1000만∼3000만원 가격을 낮춘 매물이 한두 개씩 나오고 있다”고 했다.
실제로 강남 4구를 중심으로 대책 발표 2∼3일 전부터 문을 닫고 관망하는 중개업소가 많았다는 게 업계의 평이다. 지방 부동산의 양대 강자로 꼽히던 세종과 부산의 시장 표정은 극명히 갈렸다.
세종시 도램마을 근처 C공인중개업소 관계자는 “세종시 집값이 완만하게 오르고 있긴 한데 서울·과천과 함께 묶일 정도는 아니다”며
“시장 급랭이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반면 부산 해운대의 D공인중개업소 측은 “지난 6월부터 거래가 끊기면서 조용한 상황”이라며
“투기과열지구에서 부산이 제외돼 다행”이라고 말했다. 다만 정부가 추가 규제를 언급하면서 부산도 안심하긴 이른 상황이다. 건설사도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회사별로 경쟁 구도를 보이던 재건축 단지 유치에 신중해질 수밖에 없다는 반응이다.
한 대형 건설사 관계자는 “고강도 대책으로 인해 미분양이 발생하면 그 리스크를 건설사가 고스란히 떠안게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며
“리스크 관리 차원에서 재건축을 대하는 건설사의 입장도 보수적으로 변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대출 규제에 신규 아파트 청약 수요도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전문가들은 참여정부 당시 부동산 대책을 떠올릴 정도로 강도가 센 이번 정책이 일단은 성과를 거둘 것으로 전망했다.
함영진 부동산114 리서치센터장은 “주택가격 상승률이 점차 둔화되고 갭투자 및 분양권 거래 수요도 줄어들 것”이라며
“2000년 이후 들어 역대 정부 최고 수위의 규제로 인해 단기적인 성과도 예상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심교언 건국대 부동산학과 교수는
“하반기 금리 인상 가능성에 재건축 초과이익환수제 부활 등이 예고된 상황에서 하방 압력이 더 세질 수 있다”며
“주택시장이 안정되는 범위를 넘어 시장 침체가 장기화될 경우에 대비한 조치도 필요하다”고 지적했다.